사고의 형태
발견에서 정작 희소한 것은 더 강력한 생성기도, 더 날카로운 판정자도 아니다. 옳은 수를 도달 거리 안으로 들여놓는 구조, 곧 머릿속 도서관의 형태다.
한동안 나는 모델이 멈춰 있다는 것을 그 장애물로 여겼다. 훈련이 끝나는 순간 파라미터가 고정되어, 배우지 못하는 정신이 끝내 아무것도 새로 찾아내지 못하듯 말이다. 그러나 발견은 시냅스 안에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수학은 변하지 않은 하드웨어 위에서 스물세 세기 동안 자라났다. 어느 한 사람의 머릿속이 아니라, 그 바깥의 표기와 증명이라는 레이어 안에서. 그러니 멈춰 있다는 것이 장벽이 아님을 받아들이자. 자라나는 것은 어차피 모델 바깥에 있으니까. 그렇다면 생성도 문제가 아니다. 모델은 자유롭게 생성하고, 시간만 넉넉하면 생성기는 무엇이든 다 내놓는다. 타자기로 가득한 그 옛 방을 오래 돌리면 끝내 모든 책이 찍혀 나오듯이. 그 타자수를 무작위가 아니라 초인적으로 유능하게, 우리가 그려 볼 수 있는 무엇보다 빠르고 지금껏 쓰인 모든 글에 능통하게 만들어 보라. 그래도 그것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지가 내가 끝까지 풀어내려는 것의 전부다.
그 빠른 타자수는 순전한 역량이 정작 희소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증거다. 여기서 중요한 의미로 보자면 그것은 무한한 역량을 지녔는데, 그래 봐야 잡음을 더 빨리 쏟아낼 뿐이다. 빈 과녁을 향한 속도란 초당 잡음이 늘어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빠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힘이 아니며, 더 강력한 생성기가 그것을 채워 주지도 않는다. 이 점은 한참 곱씹어 볼 만하다. 이런 시스템을 둘러싼 공적 논의의 거의 전부가 힘에 관한 것, 곧 규모와 모델이 얼마나 해낼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자수는 분명히 말해 준다. 세상에 있는 힘을 죄다 가지고도 그것으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수 있다고.
그다음 자연스레 눈이 가는 자리는 판단이다. 생성이 값싸고 그 대부분이 잡음이라면, 정작 희소한 것은 좋은 것을 잡음에서 가려내는 무언가, 곧 출력에 점수를 매겨 간직할 만한 것만 남기는 판정자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허수아비가 아니다. 지금 가장 진지한 작업이 놓인 자리에 무척 가깝다. 보상 모델과 등급을 매긴 보상, 그리고 시스템을 훈련시켜 겨눌 수 있는 신호를 향한 오랜 탐색이 모두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부분적으로 옳다. 발견이란 그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끝내 성립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새로운 것이며, 성립한다는 것은 하나의 판결, 곧 그 수의 바깥에서 그것을 두고 내려지는 판정이다. 그러니 판단은 실재하고 답의 일부이며, 한동안 나는 그것을 답의 대부분으로 여겼다.
그렇지 않다. 그리고 왜 그런지를 보는 것이 이 글의 나머지가 기대고 선 전환점이다.
완벽한 판정자도 탐색할 수 없는 공간 위에서는 쓸모가 없다. 후보가 좋은지를 결코 틀리는 법 없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판정자를 줄 끝에 세워 두고, 그다음 그 후보들이 어디서 오는지를 물어보라. 그것들은 생성기에서 오는데, 그 생성기는 정작 판정할 가치가 있는 소수가 끝내 도착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공간을 표본으로 훑는다. 판정자는 빈 결재함을 앞에 두고, 흠 하나 없이, 하릴없이 앉아 있다. 그것이 승인했을 제안들은 저 바깥, 그 순전한 크기가 곧 실제 어려움인 공간 속에 있고, 판정자 안의 무엇도 그 공간으로 손을 뻗어 옳은 하나를 가까이 끌어오지 못한다. 그러니 희소함은 판정이 일어나는 줄의 끝에 있던 적이 없다. 그것은 줄의 시작, 곧 무엇이 애초에 제안되는가에 있었다. 제안 공간은 비가산적으로 무한하며 그 거의 전부가 잡음이고, 무언가가 끝내 발견되는지를 가르는 물음은 그 가운데 사라질 듯 작은 어느 한 부분을 우리가 들여다보기라도 하는가다. 이 점을 또렷이 이름 붙이지 못한 채 그 둘레만 맴도는 분야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지금의 노력은 검증 가능한 보상에 맞서 모델을 훈련시키는데, 그 작업을 둘러싼 미결의 논쟁이란 바로, 그 검증 가능한 보상이 모델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 주는지, 아니면 이미 도달할 수 있던 것에서 더 효율적으로 표본을 뽑게 할 뿐인지다. 판정자가 그 희소한 것이었다면 그것을 더하는 일이 도달 범위를 분명히 넓혔을 것이다. 그것이 도달 가능한 것에 가중치만 다시 매기는 데 그칠지도 모른다는 점이야말로, 도달 범위가 다른 어딘가에서 정해졌다는 조용한 시인이다.
이것이 판정의 문제가 아니라 진짜 어려움임을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모두가 가리키지만 내 생각에는 대개 잘못 읽는 그 시스템이다. 한 프로그램이 처음으로 최고의 사람들보다 바둑을 더 잘 두었을 때, 대부분이 얻은 교훈은 이제 기계가 인간의 직관보다 국면을 더 잘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가자는 그것만으로는 바둑에서 속수무책이다. 그 공간은 합법적인 국면의 수가 십의 백칠십 제곱에 이르러 보이는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고, 어느 한 국면을 완벽하게 채점하는 판정자라 해도 그 모두를 채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작동하게 만든 것은 평가가 아니었다. 판이 주어지면 둘 만한 수를 몇 개로 좁혀, 한 국면이 허용하는 수백 가지 수에서 탐색의 너비를 한 줌으로 줄이는 신경망, 그리고 그 몇 개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트리 탐색, 그것이었다. 평가자는 깊이를 쳐 내고 좁히는 쪽은 너비를 쳐 냈으며, 탐색할 수 없던 공간을 탐색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꾼 것은 바로 그 좁히는 쪽이었다. 그 유명한 수, 이세돌과의 두 번째 대국에서 해설자들이 처음에는 실수로 여겼던 그 수는, 인간의 기보가 만분의 일쯤으로 매기던 수였고, 요점은 기계가 그것을 좋다고 판정했다는 데 있지 않다. 요점은 기계의 탐색이 애초에 그 수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 사람의 사전 판단이 사실상 지워 버렸던 수를 그것이 진지하게 다루는 작은 집합 안에 품고서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에 도달한 일이 곧 성취였다. 그리고 이야기에서 흔히 떨어져 나가는 대목은, 이 좁히는 쪽이 바둑에 맞게 재단되고 바둑으로 훈련되어 그 하나의 판에 맞춰졌으며, 다른 어디로도 옮겨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의 일반판은 없다. 한 공간을 탐색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그 공간의 형태에 맞게 재단되어야 한다.
그러면 물음은, 그 좁히기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곧 셀 수 없는 공간의 어느 작은 부분이 들여다볼 가치가 있는지를 정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된다. 바둑에서는 그것이 훈련된 신경망이었다. 사고 전반에서 그것은 한결 덜 분명하지만, 일단 보고 나면 다시 못 본 척하기 어려운 무엇이다. 그것은 내가 이미 아는 것의 구조다. 사실을 평평하게 쌓아 둔 더미는 도달을 조금도 내주지 못한다. 어느 지점에서든 다음 걸음이 저마다 똑같이 그럴듯하고, 공간은 사방으로 여전히 셀 수 없는 채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옳은 구조 안에 담긴 지식은 더미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선 자리에서 무엇이 수로 치는지를 고정하여, 시도해 볼 만한 다음 수는 몇 개뿐이고 나머지는 떨어져 나가게 하며, 그제야 탐색이 갈 곳을 갖는다. 내가 아는 것의 배열은 다음에 무엇을 시도할지에 대한 사전 분포다. 지식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는 정돈의 문제가 아니고, 거기서 얼마나 빨리 끄집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도달 가능한지를, 다시 말해 내가 마침 선 그 자리에서 무엇이 발견될 수 있는지를 정하는 것이다.
그 사전 분포를 정하는 것은 한 영역을 실제로 묶는 관계, 곧 한 조각이 다음 조각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그 무엇이며, 그 관계는 영역마다 달라진다. 수학에서는 하나의 결과가 다른 결과를 함의하고, 시도해 볼 만한 수는 지금 가진 결과들이 증명하게 해 주는 바로 그것이다. 함의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각 단계는 그 아래 단계 위에 얹히는데, 이런 관계에 들어맞는 구조가 바로 탑이다. 취향에는 함의가 어디에도 없다. 담백하고 느긋한 음반 하나를 사랑했다고 해서 다음 음반을 사랑할 의무가 생기지는 않으며, 함의를 대신하는 것은 그저 위치, 곧 하나가 다른 하나의 곁에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시도해 볼 만한 수는 이미 사랑하는 것에 가장 가까이 놓인 것이다. 그 관계는 양쪽으로 흐르고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지 않으며,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탑이 아니라 거리 공간이다. 위도 아래도 없고, 오를 것이 없는 공간이다. 다른 영역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묶인다. 역사의 사건들은 시간 위에 펼쳐진 인과를 따라 움직인다. 여기서 수는 현재가 일어남직하게 만드는 것으로 향하고, 그 관계는 함의처럼 앞으로 흐르되 증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계를 통해서 흐른다. 하나의 문헌은 참조를 따라 움직인다. 저마다의 저작이 자신이 끌어다 쓴 저작들 위에 얹혀, 방향이 있으되 고르지 않은 연결들의 그물망을 이루며, 여기서 시도해 볼 만한 수는 눈앞의 것이 딛고 선 그 무엇으로 거슬러 내려가는 것이다. 관계들은 그만큼이나 서로 다르고, 구조는 제 영역이 실제로 지닌 관계로부터 지어졌을 때에만 제값을 한다.
한 영역에 엉뚱한 관계를 쥐여 주면 왜 그런지 느낄 수 있다. 취향을 함의 위에서 돌아가는 것인 양, 이것을 사랑하면 저것도 사랑해야 한다는 규칙들의 탑으로 지어 보라. 그러면 탐색은 무엇이 뒤따르는지를 좇고, 뒤따르는 것이 없으니 있지도 않던 규칙들을 지어내는 사이, 정작 중요했던 것, 곧 지금 가진 것 곁에 조용히 놓여 있던 그것은 끝내 목록에 오르지 못한다. 수학을 닮음 위에서 돌아가는 것인 양, 다음 것이 곧 앞엣것과 닮은 무엇인 양 지어 보라. 그러면 탐색은 표면만 같을 뿐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는 닮은꼴들을 끌어올리고, 정작 진짜로 뒤따르는 결과는 그 바깥 멀리에 놓인다. 내가 쥐고 있던 어느 것과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엉뚱한 관계는 탐색을 느리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탐색을 중요했던 그 수에서 비껴 가도록 겨누는데, 이는 그 수를 발견할 수 없게 만드는 것과 매한가지다. 어떤 역량도 그것을 구해 내지 못한다. 역량은 애초에 희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어긋남은 조용하기까지 하다. 시스템은 여전히 답을 내놓는다. 다만 엉뚱한 관계를 따라 답할 뿐이고, 그것은 어디로도 새로 나아가지 못하는 더딘 무능으로만 느껴진다.
이렇게 보면 인간 발견자는 우리가 흔히 쓰는 빛과는 다른 빛 아래 놓인다. 우리는 발견자에게 더 날카로운 판단이나 더 빠른 머리를 공으로 돌리고, 그 일을 선택의 순간, 곧 좋은 착상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알아보는 일로 그리곤 한다. 그러나 발견자가 지닌 더 드문 것은 끝에서의 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애초에 그 좋은 착상을 한 수 거리 안으로 들여놓은, 머릿속의 구조다. 한 분야가 여러 해에 걸쳐 머릿속에 실려 들어와 그 참된 수들은 먼저 떠오르고 헛된 갈래들은 떨어져 나간 끝에, 바깥에서 보면 도약처럼 보이는 그 수가 그 구조 안에서는 옆방으로 들어서는 짧고 거의 빤한 한 걸음이 되는 것이다. 마땅히 보이지 않았어야 할 공간에서 옳은 제안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그 구조가, 우리가 취향이라 불러 온 것의 대부분이다. 취향은 세련된 판단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좋은 수를 도달 거리 안으로 들여놓는 지도다. 훈련된 수학자에게는 있으나 빠른 타자수에게는 없는 것이고, 판단도 아니고 힘도 아니다. 그것은 머릿속 도서관의 형태다.
내가 끝내 매듭짓지 못하는 것은, 사고에 그런 형태가 하나뿐인지 아니면 여럿인지다. 여럿이라면 저마다 제 영역에 맞게 재단되어 다른 무엇으로도 옮겨 가지 못한다. 그 바둑 프로그램의 좁히는 쪽이 아무 데로도 옮겨 가지 못했던 것처럼. 만일 후자라면, 발견의 진짜 일은 더 강력한 생성기나 더 날카로운 판정자가 아니라, 한 영역에 맞는 옳은 구조를, 곧 그 영역의 좋은 수들을 도달 거리 안으로 들여놓는 그 배열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 일은 더디고 개별적이며 대개 아직 지어지지 않았고, 한 영역에서 그것을 해내는 이는 그 영역을 비로소 탐색할 수 있게 만드는 바로 그것을 손에 쥔다. 그 아래에는, 내가 차라리 이르지 않았더라면 싶은 더 어려운 물음이 놓여 있다. 만일 취향이 스스로 지어 낸 것이 아니라 한 분야로부터 실려 들어온 구조라면, 미지를 향해 자유로이 손을 뻗고 있다고 느끼는 발견자는 실은 자신이 그리지도 않았고 볼 수도 없는 지도의 짧은 국소적 걸음들을 밟고 있는 셈이다. 그 드문 수, 곧 그 지도 자신의 수들로는 결코 이를 수 없던 곳에 가닿는 그 수는, 그렇다면 환상이거나 아니면 유일하게 진짜인 발견이거나 둘 중 하나이고, 지도 안에서는 그 둘이 정확히 똑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