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않는 이에게 매혹은 무엇인가
과하게 나아가지 않으면서 경외에 이름을 붙여 보려는 한 이성주의자의 시도.
클로이 자오(Chloé Zhao)의 인터뷰를 보고 있었는데, 그는 한 단어로 거듭 돌아오곤 했다. 나를 늘 조금은 긴장하게 만드는 단어, 바로 *매혹(enchantment)*이었다.
그 말이 싫어서가 아니다. 그 말이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들을 너무 자주 끌고 오기 때문이다. 초자연을 넌지시 암시하는 말. 막연한 주장. 기준을 좀 풀어 놓고는 그걸 지혜라 부르라고 청하는 듯한 부드러운 빛.
그러나 그는 그렇게 쓰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매혹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드넓었고, 영적이면서 세속적이었으며, 둘 중 어느 쪽도 억지로 이기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경외처럼 들렸다. 예술가가 부끄럼 없이 그려 낼 수 있고 아이가 허락 없이도 느낄 수 있는 그런 경외. 아름답게 옮긴 말이긴 했지만, 손을 휘저어 얼버무리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어느새 닿지 못하게 된 평범하고 실재하는 무언가를 가리키며, 그걸 되찾고 싶어 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 결합이 나를 붙들었다. 흐트러짐 없는 부드러움.
나는 기질로 보나 훈련으로 보나, 무엇을 “참”으로 내 마음에 들일지에 신중하다. 나는 무신론자다. 현실 대신 위안을 받고 싶지 않다. 정당화하지 못할 주장에 기대는 의미를 바라지 않는다. 내 믿음은 마땅히 치르고 얻은 것이기를 바란다.
문제는, 기준을 온전히 지키고도 끝내 조용한 결핍에 다다를 수 있다는 데 있다. 극적인 위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이따금 찾아오는 평평함에 가깝다. 삶이 설명되면서도 깃들여 살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느낌, “어떻게”는 또렷한데도 “왜”는 얄팍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느낌.
그래서 자오가 매혹을 말했을 때 나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느꼈다. 하나는 감탄, 거의 안도에 가까운 것이었다. 부끄럼 없이 다가갈 줄 한 번도 몰랐던 무언가를 그가 그토록 자연스레 말한다는 데서 오는 감탄. 다른 하나는 의심이었다. 조심하라고 이르는 반사. 사람들은 늘 아름다움을 빌려 거짓을 마음속으로 들여보낸다.
그런데 듣고 있으려니 또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고, 그것이 나를 놀라게 했다. 무엇 하나 타협하라고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혹이 우주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라면 어떨까. 평소의 틀이 갑자기 너무 작게 느껴질 때 찾아오는 주의의 이동. “모형”을 형식 그대로 뜻하는 건 아니고, 그저 “이걸 내가 안다고 여겼던 것에 끼워 맞출 수가 없다”는 평범한 뜻에서다. 그것은 슬픔과 함께, 사랑과 함께, 예술과 밤하늘과 한 곡의 음악과 함께, 너무 세게 와닿는 한 문장과 함께 올 수 있다. 내 설명은 여전히 작동하지만, 바다에 대고 들어 올린 물 한 잔처럼 느껴진다. 한순간 무언가가 열린다. 주의는 고요해지며 넓어지고, 자아는 더 조용해진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만 덜 중심에 놓일 뿐이다. 나는 이것을 잴 알맞은 척도가 아니다.
인정하기 묘한 건, 내가 전에도 여기 가까이 가 본 적이 있다는 점이다. 다만 매혹이라 부르지 않았을 뿐이다. 매혹은 다른 사람들 몫이라고 여겼으니까. 영적인 언어에 본디 잘 열려 있는 사람들, 또는 그게 무엇을 함의하는지 걱정하지 않고도 경이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사람들의 몫.
내 나름의 문은 거의 민망할 만큼 단순한 것, 바로 척도를 떠올리는 일이었다. “우리는 별먼지다”라는 구절을, 적어도 그 뒤에 놓인 발상을, 나는 스무 살 때 비포 선라이즈에서 처음 들었다. 그때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낭만적인 문장처럼, 젊을 때 심오하게 들리고 싶어 인용하는 그런 부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문장은 내게 남았고, 이따금 충분히 오래 곁에 두고 있으면 더는 한낱 구호이기를 그친다.
내 몸의 원자들이 별에서 벼려졌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정말로 헤아릴 때, 깊은 시간과 우주의 나이를 헤아릴 때, 내 안의 무언가가 느슨해진다.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제 비례를 찾아 줄어든다. 내 개인의 서사가 자기가 주된 서사라고 우기기를 그친다. 세계가 내 문제보다 커진다. 깔보는 식으로가 아니다. 그것은 안도다.
그것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고, 우주를 더 다정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내게 목적을 쥐여 주지도 않는다. 그저 한순간 내 줄거리의 손아귀를 느슨히 풀 뿐이다. 잠시 동안 방은 더 넓게 느껴지고, 걱정은 덜 절대적으로 느껴지며, 나는 이미 여기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알아챈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같은 작은 틀로 밀어 넣기를 그쳐서다.
내가 앞서 저지른 잘못은 여기 있었다고 생각한다.
전에 나는 매혹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게 마치 이성과 겨루기라도 하듯 내가 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믿으라 청하는 거라고 여기곤 했다. 그것이 의미를 가질 유일한 길은 형이상학적 약속을 달고 오는 것뿐이라는 듯이.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하는 일은 더 단순하다.
매혹이란 마음이 더 큰 틀로 갱신될 때 느껴지는 바로 그 느낌일지도 모른다.
그 갱신은 순전히 지적인 것이 아니다. 증명에 다다르듯 거기 이르지는 않는다. 먼저 느껴진다. 작은 넓어짐. 안에서 떠들던 해설자의 조용해짐. 광대하고 정교하고 실재하는 무언가 안에 내가 있으며, 평소 나에게 쏠리던 초점이 그것을 보기에 알맞은 렌즈가 아니라는 느낌.
그것이 내 가치를 다시 배열한다고는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겠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것이 하는 일은 더 조용하다. 나를 내 머릿속에 갇힌 상태에서 아주 조금 풀어 주고, 이미 내가 마음 쓰던 것들에 조금 더 가닿게 한다.
그 부분이 바로 내가 전에는 말할 줄 몰랐던 것이다. 나는 진리를 기준으로 삼는 일에는 늘 편안했지만, 의미를 하나의 힘으로 삼는 일에는 덜 편안했다. 의미는 마땅히 지어내야 하는 무언가처럼, 또는 마땅히 찾아내야 하는 무언가처럼, 또는 마땅히 거기 있는 척해야 하는 무언가처럼 들릴 수 있다.
나는 척하고 싶지 않다.
내가 바라는 건, 왜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의미가 어렵게 느껴지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자기기만의 냄새가 나는 거라면 무엇이든 불신하도록 훈련된 사람들. 갈망을 이따금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들. 설명에는 능하지만 자기가 아는 것에 깃들여 사는 일에는 늘 능하지만은 않은 사람들.
매혹은, 내가 옳게 이해하고 있다면, 의미를 논증해서 풀어내지 않는다. 틀을 바꿈으로써 의미를 더 가닿을 만한 것으로 만든다.
바로 여기서 내 의심도 되돌아온다. 그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은 강렬함을 확신과 혼동한다. 우리는 “이것이 나를 움직였다”를 “이것이 무언가를 증명한다”로 둔갑시킨다. 아름다움이 용매가 된다. 회의가 녹아 버린다. 그러고 나면 무엇이든 정당화될 수 있다.
나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데리고 살 수 있는 선을, 무감한 채로 머물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내 기준은 온전히 지키는 선을 그어 보려 한다.
경험은 나를 바꿀 수 있다. 주장에는 여전히 증거가 필요하다.
나는 경외가 내 주의를 다시 배열하도록 두면서도, 그것이 물리학을 다시 쓰도록 두지는 않을 수 있다. 감정을 우주의 작동 방식에 관한 논증으로 둔갑시키지 않고도 마음이 움직이도록 둘 수 있다.
전에 나는 매혹 같은 말을 들으면 곧장 속임수부터 찾곤 했다. 그게 기준을 잠시 내려놓으라는, 아름다움이 증거의 일을 대신하게 두라는, 한낱 느낌을 가져다 세계관이라 부르라는 초대라고 여겼다. 그건 여전히 내 두려움이고, 나는 그 두려움이 터무니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오의 말을 듣고 난 뒤로, 내 의심이 이야기의 전부라고는 덜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그 단어를 거부한 건,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내가 믿지 않는 무언가로 둔갑시키지 않고서 붙들 줄 몰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매혹은 우주에 관한 논증이 전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내 틀이 넓어지고 내 주의가 덜 정직해지는 게 아니라 더 정직해지는, 바로 그 순간일 뿐이다.
무엇이 그 넓어짐을 미덥게 불러오는지, 또는 그것을 강요하지 않고도 청해 들일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이 연기로 변하지 않게, 또는 걸치고 다닐 또 하나의 정체성이 되지 않게 어떻게 지킬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전에는 없던 방식으로 내가 호기심을 품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 물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여전히 무신론자다. 진리에 대한 내 기준은 바뀌지 않았다. 그 변화는 그보다 더 작다. 경이가 정직함과 양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속지 않으려는 내 꺼림이 곧 움직임에서 영영 거리를 둔 채 사는 일을 뜻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나는 조금 더 기꺼이 인정하게 되었다. 매혹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뜻에서든 실재한다면, 그것은 틀의 이동이 실재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실재할지 모른다. 하나의 믿음이 아니라, 그저 짧은 넓어짐. 자리를 내어 주는 한 마음.